
활자나 장면에 대한 기억력은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 상황의 흐름이나 대화, 어떤 사건의 원인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유독 기억력이 딸린다. 예를 들어 친구가 "이러이러한 약속을 지난 몇월에 했었잖아" 라고 얘기하면 열번 중에 여덟 번은 "응? 우리가 그랬던가" 하고 갸우뚱거리기 일쑤고, "저번에 너가 이러이러 하고 말했잖아" 라고 추궁하면 열번 중에 아홉 번은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하고 되묻곤 한다. 중요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인 장면만 남아있을 뿐, 어째서 그런 일들이 생겼고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기억력이 부실하다. 대신 나는 그날의 냄새나 명암, 날씨, 분위기, 색깔처럼 복합적이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를 보유중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난 대화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말라.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간 일요일 오후 두시의 나른함, 빨래를 널고 팡팡 두드리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들이날의 할머니 한복 색깔처럼 고운 비취빛이어서 깜짝 놀랐었다.
남자친구를 마중하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 달려나갔는데, 공기는 차갑고 귀는 시려웠고 발끝이 놀랄만큼 가벼워서 강종거리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옆을 지나가는 아저씨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아무도 없는 빈 방, 구석에 등을 대고 모서리를 느끼며 오래 오래 앉아있었는데 방구석에서는 희미하게 곰팡이 냄새가 났다.
틀림없이 잘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남자아이와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감기기운이 있었고 그 남자애는 계속 줄담배를 피우다 아래로 꽁초를 던졌고, 빨간 불빛이 나선을 그리다 땅바닥에 부딪혀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인사동 앞 건널목, 11월, 징그럽게 추워서 계속 콧물이 났고 건물들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은 금요일이었고 오후 한시였는데도 햇빛이 노란 초겨울이었다. 옆에 선 일행에게서 좋아하는 향수 냄새가 났다.
수능날 아침, 불안하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엄마가 담아준 보온병 속의 연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목도리를 둘둘 감고 앉아있었다. 낮선 학교였기에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가 났다. 떨리는 대신 불쾌해졌다.
통화중에 기분이 너무 엉망이 되어서 배터리가 없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갓 빨아온 이불의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좀 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침대 옆 창문으로 아침 햇볕이 너무 달고 감미롭게 내리쬐는 바람에, 일어나야되는데 일어나야되는데 하다가 그대로 하루를 꼬박 넘겨 버렸다. 게으른 팔로 이불 위를 더듬어 리모콘을 찾아 TV를 켜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천안역에 내리자마자 지린내가 났다. 서둘러 역 앞을 빠져나오니 이번엔 달착지근한 호두과자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
2003년 1월, 이른 아침에 남의 이불 속에서 잠이 슬몃 깨고 있는데 우르릉 천둥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함박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위로 솔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덧글
astrud 2009/10/26 17:41 # 답글
나에게는 영~ unfamiliar scene 들 이로군..^^
달과자 2009/10/29 00:09 #
ㅎㅎ절묘한 인용
casaubon 2009/10/27 21:37 # 삭제 답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왔는데 볼 거 너무 많아서 당황만 하고 간다. 벼르고 있어, 다시 올거야. 다시 와서 다 볼거야.
달과자 2009/10/29 00:09 #
제발좀요.
casaubon 2009/11/17 19:31 # 삭제 답글
영화보자. 솔로이스트.
달과자 2009/11/17 22:14 #
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완전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