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5 03:16

기억력과 장면들 NOTE


활자나 장면에 대한 기억력은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 상황의 흐름이나 대화, 어떤 사건의 원인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유독 기억력이 딸린다. 예를 들어 친구가 "이러이러한 약속을 지난 몇월에 했었잖아" 라고 얘기하면 열번 중에 여덟 번은 "응? 우리가 그랬던가" 하고 갸우뚱거리기 일쑤고, "저번에 너가 이러이러 하고 말했잖아" 라고 추궁하면 열번 중에 아홉 번은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하고 되묻곤 한다. 중요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인 장면만 남아있을 뿐, 어째서 그런 일들이 생겼고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기억력이 부실하다. 대신 나는 그날의 냄새나 명암, 날씨, 분위기, 색깔처럼 복합적이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를 보유중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난 대화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말라.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간 일요일 오후 두시의 나른함, 빨래를 널고 팡팡 두드리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들이날의 할머니 한복 색깔처럼 고운 비취빛이어서 깜짝 놀랐었다.

남자친구를 마중하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 달려나갔는데, 공기는 차갑고 귀는 시려웠고 발끝이 놀랄만큼 가벼워서 강종거리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옆을 지나가는 아저씨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아무도 없는 빈 방, 구석에 등을 대고 모서리를 느끼며 오래 오래 앉아있었는데 방구석에서는 희미하게 곰팡이 냄새가 났다.

틀림없이 잘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남자아이와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감기기운이 있었고 그 남자애는 계속 줄담배를 피우다 아래로 꽁초를 던졌고, 빨간 불빛이 나선을 그리다 땅바닥에 부딪혀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인사동 앞 건널목, 11월, 징그럽게 추워서 계속 콧물이 났고 건물들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은 금요일이었고 오후 한시였는데도 햇빛이 노란 초겨울이었다. 옆에 선 일행에게서 좋아하는 향수 냄새가 났다.

수능날 아침, 불안하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엄마가 담아준 보온병 속의 연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목도리를 둘둘 감고 앉아있었다. 낮선 학교였기에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가 났다. 떨리는 대신 불쾌해졌다.

통화중에 기분이 너무 엉망이 되어서 배터리가 없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갓 빨아온 이불의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좀 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침대 옆 창문으로 아침 햇볕이 너무 달고 감미롭게 내리쬐는 바람에, 일어나야되는데 일어나야되는데 하다가 그대로 하루를 꼬박 넘겨 버렸다. 게으른 팔로 이불 위를 더듬어 리모콘을 찾아 TV를 켜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천안역에 내리자마자 지린내가 났다. 서둘러 역 앞을 빠져나오니 이번엔 달착지근한 호두과자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

2003년 1월, 이른 아침에 남의 이불 속에서 잠이 슬몃 깨고 있는데 우르릉 천둥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함박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위로 솔솔 눈이 내리고 있었다.


2009/10/19 21:13

우울 타파 메뉴얼 NOTE


우울한 날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Plan A:
노래를 듣는다. 이문세, 박효신, 자미로콰이, 제이슨 므라즈, 제임스 모리슨, 브로콜리 너마저 등이 우울한 날 내 아이팟의 플레이리스트이다. 특히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와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번갈아 들으면 기분이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우울한 날의 정점을 찍게 된다니까.

Plan B:
맛있는 것을 먹는다. 약간 크게 갈아서 잘 부풀린 콜롬비아 원두에다 물줄기를 아주 가늘게 내려서 뽑은 드립커피, 필라델피아 치즈케익, 성게알 초밥, 따끈한 밥 위에다 간장게장을 잘 분리한 후에 참기름과 통깨와 송송 썬 파를 올린 것, 진짜 한우 등심 스테이크, 따끈하고 맑고 색깔도 기가 막힌 황금빛의 콘소메 스프, 바삭바삭하고 쉿쉿 기름 스며드는 소리가 나는 감자 고로케, 찬밥에 진하게 우려낸 녹차를 붓고 함께 먹는 묵은김치, 아빠가 볶아준 볶음밥, 진하다 못해 진득하게 알단테 면을 감싼 크림 스파게티, 아직 싱싱해서 움찔거리는 살 위에다 레몬즙 뿌리고 초장 살짝 엊어서 마늘편과 함께 후루룩 먹는 석화, 아삭거리는 양상추와 양파와 토마토와 달걀 샐러드가 두텁게 들어있는 샌드위치, 백화점 지하 식당에서 남자친구와 먹는 일본식 돈가스, 엄마와 자기 전에 TV 보면서 깎아 먹는 과일들.

Plan C:
사진을 찍는다. 예전엔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자주 출사를 나갔지만 요새는 먹고 살기 바빠진데다 주위에 사진찍는 사람이 전무해져서 사라진 취미가 되었다. 로모 Lc-A 상태 상급과 니콘 FG-20 상태 상급 내놓을까 생각중이다. 관심있는 분 덧글 남겨주세요.

Plan D:
술을 마신다. 주로 맥주를 마시는데 앤초비맛 올리브 큰 병 하나와 익힌 토마토, 김, 잘게 부순 생라면 등과 함께 해치운다. 혼자 방에서 마실때는 피처 큰것 한개로 끝나고 밖에서 지인들과 마실 때는 3000cc정도 마시는 것 같다. 사실 오늘도 마셨지롱. 요즘들어 매일같이 마시고 있지롱. 어제는 취해서 헤롱거렸지롱!!

Plan E:
영화를 본다. 오늘은 '헤어스프레이'와 '17 Again'과 '하이스쿨 뮤지컬-시니어 이어'를 보았다. 그렇다. 오늘은 잭 애프론의 날.

Plan F:
산책을 한다. 생애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나이키 맥스(운동화 처음 사봄)를 신고 아이팟을 귀에 꽂고 플레이리스트는 Plan A의 곡들로 구성된 On-The-Go로 설정해둔다. 요즘 주로 산책하는 곳은 경기전 뒤쪽 교동 골목과 예전에 살던 동네. 학교 다닐적에는 학교 정문-천변-굴다리-시민공원-주택가 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산책로가 있었더랬다. 야밤에 걸으면 죽여줬는데.

Plan G:
쇼핑을 한다. 예전에 초특급으로 우울했던 어느 초겨울, 충동적으로 캐시미어 카디건하고 팔목까지 올라오는 모 장갑하고 끌로에 라이딩 부츠를 사고 한달 월급 거덜나서 거지꼴로 연명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카디건은 엄마가 가져갔고 모 장갑은 술먹고 잃어버렸고 부츠는 관리를 잘못해서 곰팡이 슬었다. 올해엔 또 어떤 충동구매를 하게될까. 꺄아- 기대돼

Plan H:
서든어택을 한다. 나를 위한 총 SIG로 헤드라인 빵빵 터트려주면 우울도 한발짝 물러서는 느낌. 일단 웨어 두어바퀴 돌고 3보급 가서 '춰러준다'. 요즘은 킬뎃 57퍼정도 나오는데, 예전에 매번 오버뎃만 했던 날들에 비하면 많이 올렸네. 더구나 요즘은 영배 캐릭이나 박봄 캐릭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난 돈없어서 못사지만. 서든어택은 옛날에 옛 남자친구와 그 친구들때문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레인보우식스나 파크라이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남동생을 보며 '흐이구, 집구석에서 총질이나 해대는 게임폐인같으니라고' 하며 경멸을 서슴지 않던 나였다. 요즘은 클랜 탈퇴해서 3보급 도는 재미가 덜하다. 저 스카우트좀 해 주세요.



거의 모든 플랜들을 혼자 해치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라도 우울한 티를 잘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맞히고 술 마시러 가자고 종용하는 애들이 있어서 낭패. 나는 술을 마시면 대체로 기분이 좋아지지만 우울할 때 음주를 하면 반드시 체한다. 안주를 안 먹어도 체한다. 좋지 않다.

2009/10/17 03:25

네이버 인물검색 프로필 사진 PIC


제가 만약 어떤 특출난 능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거나 국제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사악한 인물이 되어 용맹을 떨치게 된다면, 네이버에 이름 석자 검색해서 바로 프로필을 열람할 수 있는 주요인사가 되겠죠.
그렇다면 그때 제 프로필 사진은


이걸로 해 주세요. 년차는 좀 된 사진입니다만 어쨌든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편한 장소(라고 해봤자 선배네 집)에서 편한 사람이 찍어준 좋은 사진. 카메라 앞에서 릴랙스되기 힘든 타입이기 때문에 저에겐 정말 귀한 사진이예요.


한창때(!) 사진도 괜찮다면 이거라도...
톨스토이는 항상 백발에 수염 성성한 할아버지 얼굴이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청년기에 발표했는데도 항상 뻗친 백발에 검버섯 가득한 얼굴이고 그에 비해 알브레히트 뒤러는 잘생긴 30대 중반의 얼굴로 기억되는걸 보면 자기가 정한 프로필이 진짜 진짜 중요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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