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4 17:20

혼자 VANILA

그런데 이 사진, 예전에 내가 살던 방이랑 정말 똑같이 생겼다. 신기해.



자존심이 센 편이 아닌데, 유독 힘들다거나 외롭다거나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잘 못한다. 한번 약한 소리 하기 시작하면 나 스스로가 정말로 그 약함에 빠져서, 혼자 허우적대다가 숨막혀 죽을 때까지 발만 버둥거리다 끝날 거라는걸 잘 알아서 말이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괜히 주변 사람들한테 문자 하나 던져 놓고 답문 기다리면서 아무 일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혼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했다.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멍청해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다. 평소에 혼자임을 추구하던 사람이다보니 가끔 이런 날에는 내가 낸 꾀에 내가 걸려 넘어지지 싶다. 아니야, 그래도 나는 좀 괜찮아. 아직까지는 좀 괜찮아. 며칠 지나면 정상 궤도를 찾을 거야. 귀에 들어오지 않는 100마디 말을 하는 10명의 사람들보다 내가 진심으로 탄복할 수 있는 몸짓 하나를 하는 한명의 사람이 낫고, 그 한명의 사람 보다 괜히 펼쳐든 책 속의 몇 글자가 더 낫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 혼자인 것은 내가 나에게 내린 벌이다. 아무도 이 매를 대신 맞아줄 수 없어.

2010/02/01 14:14

쿨핫 Go on

1. 조용한 남자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소설 속 화자인 남자들이 과묵하고 말을 아끼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올리브색 치노 팬츠에 테니스화를 신고 옅은 회색 스트라이프의 테니스 셔츠에 여름용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 소년이랄지, V넥의 캐시미어 스웨터를 단정하게 받쳐 입고 실크 스커트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 드러난 목덜미에 햇볕을 받고 서 있는 모습도 아름답긴 하다. 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당연히 함께 해오다가 불현듯 스무살에 떨어져 불완전해진 연인들이나 아무 기척이 없는 혼자만의 장소에 틀어박히기를 좋아하는 주인공도 좋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은 것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몰랐던 것이다' 의 그 분위기다. 
나는 비슷한 이유로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 남자는 너무 말이 많고 그 상황을 언제나 분석하고 규정짓고 그래프나 자료를 덧붙여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예전에 내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 다른 많은 소녀들이 그랬듯이 흉폭했고 휘두르기를 좋아했고 언제나 내 감정을 확인받기 위해 안달복달했다. 그런 악몽 같은 시절에 나의 횡포에 시달려 금쪽같은 세월을 낭비한 몇몇 소년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뭐 그애들도 상황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역시 사람은 서로 뺨 맞고 쥐어터져야 뭔가 깨닫고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하여튼 남자가 말이 없는 경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할 말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경우와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을 아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나는 오래 전에 말을 잘 참는 남학생과 친하게 지냈었다. 비밀이 많고 생각도 많고 욕망도 들끓는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그는 주의 깊게 자신의 말을 숨기고 아껴서 자신과 남들 사이에 용의주도한 선을 긋곤 했다. 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을 아끼는 소년이라니. 그는 아주 명민해서 어떻게 해야 타인을 손쉽게 콘트롤할 수 있는지 일찌감치 체득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며 그 소년 앞에서 맥을 못추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파워를 가진 남자애였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물거리며 어떻게든 입 밖으로 한 단어라도 끄집어내기 위해 용을 쓰는 걸 보면 의외로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입을 꾹 다물고 지긋이 상대방의 눈을 노려보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2. 무서운 남자
연애를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냐고 J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존대말을 쓰고 방귀 트지 말고 상대방 휴대전화 안 보면 돼"라고 대답했다. 나는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우왕 정말 간단하고도 어려운 방법이로구낭" 하고 탄복했다. J의 남자친구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마에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입가에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지르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고, 집요하고 묵직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J가 얼토당토 않은 짓을 해서 열받게 하면 남자친구는 조용히 가방을 들고 집으로 되돌아가서 전화나 문자에 일절 응답이 없이 J를 똥줄타게 했고, 반면 J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촌철살인의 몸짓 하나로 화룡점정을 찍었으며(!), 쉽게 감정이 들쑥날쑥거리는 일 없이 대개 냉정해서 평범한 여성인 J는 자주 어린애처럼 오그라들기도 했다. 하여튼 J의 남자친구는 초등학교때부터 부모님도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비범한 남자애였다고 한다.
나는 아는척 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가볍고 경박한 사람이고 때문에 나보다 더 아는척 하는 사람을 만나면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입만 열면 "오빠가 말이야, 오빠가 이랬는데, 오빠가..." 하고 운을 떼는 전형적인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기에는 공력이 한참 모자라고 일관성도 없는 여자지만 적어도 남녀 사이에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평등을 기본으로 해야 하고 개인의 성적 취향을 단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사람과 우연찮은 기회에 대화를 나누다가, 사사건건 여자는 어때야 하고 동성연애자(틀린 용어지만 더 심한 단어로 부르지 않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어떻고... 이런 말 끝에 "근데 너도, 군 가산점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하냐?" 로 마무리 지었을 때, 아... 사람은 역시 배운게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가볍고 경박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가벼운 사람을 만나면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싸구려가 될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무서운 남자가 되기는 분명 어려울 것이다. 솔직해야 하지만 뻔해져서도 안되고, 남자다워야 하지만 끝까지 남자답기만 해서도 안되고, 상대방을 존중해줘야 하지만 자존감도 지켜야 할 것이고, 이 모든 어처구니 없는 희망사항들을 내가 열거하고 있는 이유는 역시 하나다. 내가 별로 좋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뻔뻔한 것이다. 정말 좋은 여자였다면 아무말 없이 조용하게 정말 좋은 남자를 알아보고 아름답게 사랑하고 있겠지. 하지만 역시 세상은 공평한게, 나처럼 별로인 사람도 가끔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는 거다. 이래서 세상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니까.

2010/01/30 13:37

까칠하고 불편한 진실 Go on

우리 여자들은 어째서인지, 연애에 푹 빠지게 되면 우주를 거스르려는 억지를 부리려고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성적인 우리들이지만 어째서 연애라는 안대를 눈에 두르면 현실도 잊고 자신도 망각하고 쓸데 없는 이상만 좇으려 하는 것일까? 어째서 똑똑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들은 길고 짧은 연애에 실패하면 평균 이상인 자신들의 외모와 성격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술잔 위에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한참을 운 후에,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걸어가 거칠고 빳빳한 싸구려 술집 화장지로 눈 밑에 번진 마스카라를 닦아내고 몰래 담배 한대 피우고 나와서는 또 술잔 위에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인지.

바보처럼 20대 시절 내내 연애에 목을 맸다가, 반토막난 중국 펀드만도 못한 결과에 망연자실해진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이 머리를 맡대고 앉아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1. "자긴 날 영원히 사랑할거지?" 이런 다짐 받아내지 말자.
세상에 타인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죽을때까지 해후하는 부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거나, 하여튼 굉장히 큰 복을 타고난 사람들임에 분명하고, 나는 덧붙여 그러한 부부들이 온전히 변치 않는 사랑의 힘 만으로 평생을 해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책임감이 엄청나게 강하고 의리도 깊고 이해력도 출중하고 무엇보다 화를 잘 참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란 얘기다.

2. "자긴 나에게 상처주지 않을 거지?" 이런 기대 하지 말자.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정말로 그렇게 살아가길 원한다면,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편이 확실한 길일 것이다. 배구공 하나 던져줄 테니 같이 섬으로 들어가라. 내가 잘못해서 초래한 싸움이어도 내가 상처주며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 사람에게 평생 헌신할 생각이 아니라면 저 질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질문이다. 상대에게 상처받지 않길 원한다면 나도 상대에게 상처줄 생각은 접어야 한다.

3. "자긴 내가 살인해도 내편 들어줄 거지?" 이런 질문 하지 말자.
살인자 편을 들어주면 그 사람도 같이 감방행이지 않나. 괜히 이상한 질문 해서 사람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자. 나의 알량한 경험에 따르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사람 없고, 죽을때까지 착한 사람도 없고, 태평양처럼 한없이 아량이 넓은 현자 같은 사람도 없다. 모든 연애는 상대적이고,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 그 방식도 다 제각각이 되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좋은 사람도 고문기술자 이근안처럼 변신시킬 수 있으며, 한없이 착한 사람 두명이 만나도 밤낮 으르렁대며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일 수도 있다.

4. "자긴 내가 어디가 좋아?" 이런 궁금증 갖지 말자. 
그 사람은 내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데 자꾸 그걸 말로 확인해서, '말'이라는 다분히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이고, 스펙트럼 좁고 입에서 나오는 순간 뻔하고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짓은 하지 말자. 사랑이라는 건, 말이 아닐 때가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지 않나?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안달일까?


또 다시 나의 알량한 경험에 따르면,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정말 많이 참고 견디고 자기 자신의 일부는 저 멀리 뒷산 중턱에 묻고 돌아와 잊어버려야 한다. 그걸 못해서 인생에 다시 없을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사람들은 각기 상처도 받고 괴로워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돌아다니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어렵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밥먹고 얘기하고 산책한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사랑할 수 없고 나의 사랑은 굉장히 어렵게 시작되고 어렵게 끝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도 친구와 함께 머리를 맡대고 카페에 앉아서 쑥덕쑥덕, 사랑에 대해 끝없이 토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장렬히 끝을 맺은 친구 J의 어려웠던 사랑 앞에 짧게 묵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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